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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debut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으로 화가의 꿈을 오랫동안 품었으나 생활을 위해 화가로서 살지못한 세월동안 자유에 대한 끝없는 갈망, 데뷔전에는 신기회(유화)  사무총장, 야외수채화회의 회장을 맡아 습작을 시작했다.

작가의 회고
40세가 되면서 지난날의 무모한 도전은 실패를 낳는다는 경험으로 서서히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우선, 손을 풀어야 했다. 습관화와 지속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일요일에만 나가는 ‘야외 수채 화가회’에 가입했다. 잘 그리려 욕심 부리지 않고 놀이를 하듯 부담 없이 장난치듯 그렸다. 회원들은 내 그림을 보고 콧방귀를 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어린아이 같이 아무렇게 그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봤다. 이렇게 3년을 하고 수채화 개인전을 인사동 단성 갤러리에서 열었다. 작가 데뷔를 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야외수채화가회’의 사무국장을 거쳐,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 유화 사생회인 ‘화요사생회’, ‘국제화우회’, ‘토요화가회’, ‘일요화가회’, ‘현대사생회’ 등 모든 단체에 나가 본격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림이 너무 재밌어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의욕이 왕성하게 넘쳤다.
 
어디를 가든 화구가방을 들고 다녔다. 뉴욕 한 복판에서도 그렸고 백두산 천지에서도 그렸다. 제주도 관광지에서 수많은 인파가 빙 둘러 쌓인 채 질문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지 모른다는 속담처럼 그렇게 손도 다 풀리고 감성도 풍성해졌다. 전업 화가로서 본격 출발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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